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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금 일대기>동지와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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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2.3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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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와 연인들

이순금이 이재유와 동거를 하게 된 것은 애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순금은 이재유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혁명가적 성격과 달변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재유는 순금의 헌신적인 행동에 고마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녀로부터 여성의 매력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재유는 이때 이미 결혼해 고향에 본 부인이 있었고 또 서울에서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바빴기 때문에 순금과 사랑을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순금과 지내는 시간보다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학습을 시키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이재유와 이순금의 동거가 깨어진 것은 1934년 1월 이재유가 순금의 물건을 가져오기 위해 익선동 순금의 집으로 갔기 때문이다.  때 마침 왜경이 순금의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자신은 탈출을 했지만 대신 내수동 아지트가 일본경찰에 알려지면서 당시 이곳에 있었던 순금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재유 역시 나중에 김삼룡을 만나러 갔다가 봉래동에서 잡히면서 둘을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이재유는 박진홍이라는 또 다른 여인이 있었다. 이들 역시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동거했으나 나중에 진홍이 옥중 생활을 하면서 이재유의 아기를 낳아 이들이 동거 중 남녀 관계를 가진 것이 알려지게 된다.

동덕 동기생으로 학창시절에는 독서회 회원으로 그리고 졸업 후에는 공장파업에 같이 동참 했던 순금과 진홍은 나중에 서대문형무소에 같이 수감되기도 했다. 이 때 국내 일부 신문은  이재유와 이들 둘이 삼각관계라는 기사를 써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정작 이재유는 이들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이순금의 얼굴 사진까지 넣은 이 기사에는 순금과 진홍을  연적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재유를 중간에 두고 여자로서 이들 역시 질투심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외부적으로는 동창관계를 계속 유지한 형제처럼 지냈다.

다만 이재유가 해방 전 공주교도소에 이감되어 있을 때 진홍이 자주 면회를 간 것으로 나오고 있는데 반해 순금의 얘기가 없어 이재유의 마지막을 지켜준 여인이 진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금과 김삼룡은 어떤 과정을 통해 부부 관계로까지 발전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역시 부부관계를 갖게 된 것이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동지로서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이것은 둘이 동거생활을 할 때 김삼룡의 경우 정식으로 결혼을 한 부인이 있었다는데서 알 수 있다.

순금은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3명의 남자와 동거했지만 이 중 김삼룡과 가장 가까운 부부생활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당시 행동을 보면 두 사람은 단순히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거를 한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사랑을 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이런 생활을 뒷받침 해 준 것은 공산주의 조직 내에서 이들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다. 김삼룡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동안 주로 당내 조직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하룻밤에 조직을 한 개씩 만들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조직을 만드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한 일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행동을 같이 할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이들은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활동을 했는데 노동운동은 남성 못잖게 여성 조직도 중요했다. 그런데 여성 조직의 경우 당연히 순금이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 조직의 연계와 강화를 위해 자주 만나게 되고 이렇게 하다보니 서로 사랑을 느껴 부부 사이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순금은 30살 가까운 나이였지만 이재유와 헤어진 후 노동운동을 하면서 감옥소를 계속 드나들어 남녀간의 사랑을 느낄 기회가 없었다. 

순금이 마지막으로 안 남자는 박헌영이었다. 박헌영 역시 순금을 알 때 부인이 있었다.

박헌영이 부인 주세죽과 결혼 한 것은 상해 활동을 할 때였다. 박헌영이 상해로 간 것은 국내에서 3. 1 독립운동이 터진 다음 해였다. 그는 상해에 있는 동안 왕양옥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그가 한 일은 영문으로 된 공산주의 서류를 조선어로 번역해 국내와 만주의 동지들에게 발송하는 것이었다.

이 때 그는 이 일을 잘해 공산청년동맹의 조직책에 임명되면서 자기보다 두 살 아래인 주세죽을 알게 된다. 주세죽은 함경도 출신으로 피아노 공부를 하는 동시에 상해 독립운동 여성단체에 가입해 있었는데 둘은 곧 결혼했다.

이순금이 박헌영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경성 콤 그룹'을 조직할 때였다. 당시 순금은 오빠 이관술과 함께 ?경성콤 그룹?의  창설자로 활동했는데 박헌영을 영입키로 했다. 그리고 이 일을 순금이 맡아 박헌영을 설득 영입했다.  

그러나 순금이 박헌영을 만나 그를 본격적으로 도운 것은 박헌영이 광주 벽돌공장에 숨어 있을 때였다. 박헌영은 1933년 8월 상해 일본 영사관 소속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들어와 검찰에 송치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1939년까지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출옥했다. 이후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광주 벽돌공장에 숨어 있으면서 지하조직을 거느리고 공산주의 활동을 폈다.

해방 당시 박헌영 아래에는 이순금 외에도 많은 심복들이 있었지만 이 들 중 순금은 박헌영의 최 측근으로 박헌영이 지하 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지시를 조직에 전달하는 충실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때 이들은 동지애를 넘어 남녀 사이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공산주의 운동을 한 사람들은 실제로 순금과 박헌영을 부부 사이로 보고 공식석상에 나타나면 부부 예우를 했다.

이후 순금은 해방 후에도 박헌영과 함께 공산주의 재건 운동에 참여하는 등 좋은 관계를 갖는다. 해방 후 당 재건과 중앙건설에 대한 전권을 장악 한 박헌영은 남한에서 장안파를 누르고 자신이 공산당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통일재건조선공산당'을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는데 이 명단에도 이주하와 함께 이순금이 들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때만 해도 둘 사이가 이처럼 좋았지만 해방 후 이들이 북한으로 간 뒤에는 이순금이 박헌영을 배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6. 25 전쟁이 계속될  때 김일성은 박헌영 일당의 숙청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내린 죄목이 남한에서 남로당 활동을 하는 동안 미군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재판에 순금이 출석해 그가 남한에 있을 때 실제로 미국을 도왔다는 불리한 증언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 때 목숨을 건 동지였고 또  살을 섞었던 부부 사이었던 이들에게 이런 운명이 주어졌다는 자체가 비극적일 수 있지만 이 보다 충격적인 것은 순금이 박헌영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내어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로서는 이 길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이었는지 모르지만 일제시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고 또 해방 후에도 공산주의만이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순금이 왜 이처럼 변절되어 옛 동지와 남편을 배반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사진설명. 박헌영과 이순금은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하는 동안은 연인이요 부부였지만 나중에 북으로 간 후에는 순금이 박헌영을 배신해 박헌영이 숙청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박헌영 일대기가 요즘 8권의 전집으로 나와 독서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관리자  master@ulsanf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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