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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 직후 '재외선인' 활동상 日 비밀문서 해외서 찾아안중근 의거 관련 주변 인물 등 日외무성 총지휘자 비밀보고서
'성명회 선언서' 관련 인물 등 세세한 활동상 지속적 업데이트
더채널 김광만 대표 "단지동맹자 35명을 넘게 분류 연구 절실"
  • 신홍관 기자
  • 승인 2017.11.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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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 직후 일본 외무성이 해외 조선인의 활동상을 기록한 '재외선인에 관한 상황조사표' 표지. <사진제공=더채널 김광만 대표>

한일강제합병 직후 1910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된 '성명회(聲明會)'가 세계만방에 독립의지를 천명했던 선언서 원본이 107년 만에 발견('포커스데일리' 11월13일자 보도)된 가운데, 일본이 해외 조선인들의 활동을 분석한 비밀보고서도 함께 발견돼 주목을 끌고 있다.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인 '더채널' 김광만 대표는 조선총독부가 명치44년(1911년)에 작성한 '재외선인에 관한 상황조사표' 등의 비밀보고서를 일본 도쿄 외무성 자료실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역사문서보관소에서 발견했다고 14일 밝혔다.

재외선인에 관한 상황조사표는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 아리마쓰가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테쓰기치에게 보낸 문서다.

외무성 경무국장 구라치 테쓰기치는 한일합병시 외무성 정무국장으로 한일합병을 주도한 인물로 안중근 의거 사건을 총지휘하며 사형에 이르게 한 자다. 이 보고서는 '불령선인'으로 조사된 사람들 가운데 안중근 의거와 관련된 사람들이 60여명을 적시해 놓았다.

이 문서는 명치44년(1911년) 4월18일 접수됐고 닷새 전인 4월13일 '헌기 제700호'로 기밀로 분류돼 발송했다.

문서에 따르면 "재외선인의 계획 중 결사, 출판 및 학교 등과 함께 중요하다고(배일적 의미로서의 중요성) 생각되는 인명, 약력 등 종래의 여러 정보 수집록과 별지 조사표를 참고해 재외선인의 호구조사표를 첨부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일제는 이미 수년간 정보를 수집해왔고 안중근 의거(1909년 10월 26일)와 순국(1910년 3월 26일), 한일합병과 합병을 극렬히 반대했던 8624명의 '성명회 선언'과 한일합병 반대 청원운동을 보면서 재외조선인 중 일제 통치에 반대할 기미가 있는 조선인들과 결사 애국 단체 및 애국적인 교육을 하는 학교 등을 종합할 필요에 따라 밀정과 일본인 촉탁 등에 의해 수집된 자료를 총망라하고 있다.

이 문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60여명의 안중근 의거와 관계된 사람들과, 20여명의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이다.

당시 연해주와 간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직의 계보와 구성원을 망라해 놓은 것도 특징이다. 이갑을 중심으로 이갑파(28명), 최대 의병조직을 이끌었던 이범윤파(36명), 정순만파, 최재형파, 최봉준파, 엄인섭파, 이하윤파(부하 13인), 채모(부하 약 68인)파 등 이름이 알려진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처음으로 거명되는 독립운동 리더들과 성원들이 기록돼 있다.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이지만 가까이는 하얼빈 지방(안중근 의거 가담자들이 많음), 간도 지방과 멀게는 북경, 상해, 위해위, 홍콩은 물론 미국(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하와이), 프랑스까지 조사됐다. 특히 블라디보스톡 지방은 수청(빨치산스크), 연추(안중근 주 활동지), 하바로프스크,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추풍, 포석(유인석 주 활동지) 등으로 세분화 돼 있다.

실제로 바로 옆집에서 엿듣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듯한 내용들을 '적요란'에 기입해 놓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해당 자료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여러 관련 부서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안중근 의거와 관련된 사람들이 세밀히 조사 된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는 조사 시점이 안중근 재판과 겹치고 안중근 의거가 일제에게 준 충격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연해주 일대에서 안중근 의거로 새롭게 독립운동가들이 뭉치고, 의거 움직임이 일어난 후 바로 한일합병으로 인해 연해주 조선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도 그 이유다.

김광만 대표는 "이 자료는 그간 알려졌던 단지동맹원 12명을 넘어서 단지동맹자로 분류해 놓은 사람들이 35명을 넘어서고 있어 지속적인 연구와 전문가의 분석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몇 년 후의 기록이 아니고 바로 당해년에 수집되고 추적 보고된 사항이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팩트다"라면서 "안중근이 잠깐이라도 묵었던 집은 모두 조사됐고 안중근에 총알을 빌려준 사람까지(윤치종-폭도 두목, 안중근에게 탄환 대여, 소재불명) 조사됐다.

이 문서에는 안 의사가 묵었던 곳을 송학성-연추, 공자묘 관리자, 안중근 정숙소, 장선달- 안중근 숙박이 의심스러움 등으로 표시해 놓았다.

여기에 안중근 의거가 실패하면 다음 순서로 나설 사람(한종호- 단지동맹자, 안이 실패하면 김기룡과 다시 시도함)과 안중근 재판시 한인 변호사 통역으로 여순에 간 한기동(전 마산, 인천, 나가사끼 등 노국영사관 통역), 이춘길은 안중근 친구로서 단지동맹 자이자 하얼빈에 함께 간 사실 등 일거수 일투족이 조사됐다.

또한 12명 단지동맹자로 알려진 갈화천(葛化千)은 현지인이 아닌 하와이, 알래스카를 거쳐 1908년 미국에서 포석으로 왔고 안중근과 단지 동맹을 하고 의거가 일어나자 북한으로 넘어간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밖에 안중근 구제회를 위한 사람들과 안중근 비를 세우기 위해 여순에 간 문창도와, 안중근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하얼빈에 간 김종시 등 세세한 조사에 치를 떨게 한다.

또한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달리 헤이그특사 일행이 헤이그로 갈 때 니콜 리스크에서 김기장이 따라간 것으로 묘사됐고, 민비 시해의 주모지 미우라고로를 암살하기 위한 조직도 있었고, 이범석(42 우둥불의 이범석과는 동명이인) 등 여러 명이 맹원으로 나와 있다.

특히 문서에는 이상설이 1909년 7월 상순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라디보스톡에 왔는데 블라디보스톡의 배일당 영수이고, 항상 개척리(조선인 밀집 주거지)에 와서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 배일적 연설을 했다고 적시했고, 1910년 8월23일 한민학교에서 한일합방에 대한 과격한 연설을 했다고 적혀있다.

또한 키 5척45촌, 얼굴 길고, 단발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김 대표는 "이 자료는 안중근의 단지동맹자와 안중근 단독 거사에 대한 시각을 달리해야 함을 보여주고 후원자 세력이 분명 존재 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면서 "안 의사의 거사는 단독행동임이 분명하다"고 해석했다.

신홍관 기자  hksnews@ifoc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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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재외선인#비밀문서#안중근#단지동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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