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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 한국의 교회는 순례와 기도로 순교자를 기리는다.

매년 9월, 한국의 교회는 순례와 기도로 순교자를 기리는다.
  • Published9월 21, 2024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일반 신도에 의해 설립된 독특한 교회로, 9월에는 19세기 종교 박해의 희생이 된 103명의 성인과 124명의 복자를 포함한 순교자를 기리는다.

“하나님은 이 땅의 백성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키우기로 선택하셨다. 한국 서울에 있는 용수정 추기경은 2014년 프란시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열린 ‘바울 윤지춘과 다른 123명의 순교자’의 열복 10주년 미사에서 말했다 .

그 역사적인 사건으로부터 10년, 1984년에 한국의 순교자가 처음으로 복복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의 이름을 한 명씩 들으면서 “한국의 124명 순교자를 위한 기도를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있다. 욤 추기경은 또한 열복식 미사에서 교황 프란시스코가 설교하고 “무엇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끌어낼 수 있는가”라는 성 바울의 말씀을 인용한 것을 기억하고 “순교자의 승리, 즉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반복했다.

“열복 10주년에 이르러 다시 조상의 믿음을 위해 기도합시다”고 요 추기경은 말했다. “우리가 살아온 복음의 진리가 얼마나 강력하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박해를 극복하고 죽음을 이겨낸 순교자들이 보여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봅시다.”

한국교회의 뿌리를 축하

이 반성은 한국의 가톨릭 커뮤니티 전체에서 축하되는 9월 ‘순교자 월간’에 특히 의미 깊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뿌리인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바라보고 그것을 현재에 실천할 때입니다.”라고 추기경은 말했다. 전국의 가톨릭 커뮤니티는 순례, 기도의 밤새도록, 교리문답, 회의, 문화활동으로 이 달을 축하한다.

9월은 영수정 추기경의 사식에 의한 서울의 명동성당에서 미사로 시작됐다. 폐회식은 순교자 현창위원회의 위원장을 맡는 서울 구요비 보좌주교의 사식에 따라 9월 29일 서소문 순교자 성당에서 열린다.

9월 20일은 한국 최초의 사제로 순교자인 성 안데레, 김대건(1821-1846)의 공휴일이다. 대구대주교구는 9월 28일 산내면 성지 순례를 선도하고 다음날에는 청년위원회가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라는 제목의 특별 어린이 순례를 기획하고 젊은이들에게 성 안데레에 대해 가르칠 예정이라고 피데스는 보도했다.

그 밖의 행사로는 9월 21일에 니시이케무라를 출발하여 26㎞의 순례가 열리는 것 외에 강원도에서 토마스 최양엽 신부의 열복을 기원하는 기도가 열린다. 한국 각지의 다양한 교구에서도 기념 행사가 열리고 인천 신의 종 피터 이승훈의 무덤에의 순례나 의정부 안주시 순교자 성지에서의 감사 미사 등이 열린다.

9월 22일 안동교구는 세인트 안데레 김대건, 세인트 바울 정하산, 그리고 그 동료를 기리는 반면 제주교구는 이 교구의 첫 순교자인 페트로펠릭스 김기양을 기념 하는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한국 순교자 약 1만명 가운데 안데레 김태건을 필두로 103명의 가톨릭 신자 순교가 공식 기록돼 있다.

세인트 안데레 김태건의 유산

기독교가 처음으로 한국에 전래한 것은 1592년 일본 침략의 때였습니다. 그 후 1784년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하기 시작한 이승훈이 시작한 토착 신도운동을 통해 퍼졌습니다. 기독교 개종자의 부모에게 태어난 앤드류 김태건은 15세에 세례를 받고 마카오에서 배운 후 1845년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가 되었습니다. 귀국 후 선교활동을 이유로 조선왕조에서 박해되어 1846년 25세에 참수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그나티우스 김과 신도 사도 바울 정하산도 순교했다. 1984년 성 요한 바울 2세는 유교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인정하고 앤드류 김과 이그나티우스 김을 포함한 103명의 순교자를 열성했다.

토마스 최양엽 : ‘한국의 성 바울’

1821년 경건한 가톨릭교 부모님께서 태어난 토마스 최양엽은 부모님 모두 나중에 순교하고 1849년 세인트 안데레 김태건과 함께 서계되었다. 최는 박해 도중 한국으로 돌아와 피로를 모르고 여행을 하며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위로해 세례를 했다.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고 세례를 베풀어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위로한 것으로부터 ‘땀의 순교자’로 알려진 그는 교리문답서를 번역하고 전례찬가를 작곡하며 십자가와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믿음을 전파했다. 한국에서 순교한 시메온 프란소와 베르누 주교는 그를 ‘한국의 성 바울’이라고 불렀다. 최의 한국교회에 대한 공헌은 1861년 장티푸스에서 죽을 때까지 영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순교와 성장의 땅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가톨릭을 유교의 원리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조선왕조(1392~1910년)의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일반 신도의 운동으로 시작되어 성장해 갔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수천 명의 가톨릭 신자가 살해되었고, 1866년의 가장 심한 박해로는 8,000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중에는 1794년 베이징 교구에서 파견된 제임스 주문모 신부도 있었다. 1886년 한국이 프랑스와 조약을 맺은 후 박해는 끝났다.

1910년 일본 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한국 해방은 북한과 한국의 분단으로 이어졌다. 1984년 방문 중 성 요한 바울 2세는 19세기에 살해된 수천 명의 순교자 중 103명을 열성했다. 2014년 프란시스코 교황은 한국 초기 기독교인들의 엄청난 희생을 인정하고 124명의 순교자를 열복했다. 오늘날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이 나라의 인구 5262만명 중 11.3%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종교활동이 주로 상징적인 북한 교구를 계속 감독하고 있다. 북한의 평양교구는 서류상에만 존재하며, 동지의 가톨릭의 존재는 일당독재정권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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